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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탐방

광주광역시 무등산에 위치한 시도지정문화재, 의재 허백련 선생께서 기거하신 춘설헌에 다녀왔습니다.

by 예비학예사 2024.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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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세한 문화재 이야기,

 

이번 포스팅에서는 직접 문화재를 탐방했던 후기를 이야기드리고자 합니다.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예비 학예사인만큼,

문화재를 많이는 아니지만, 탐방을 하였고

그것을 티스토리로나마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런 소중한 문화재를 홍보하고자,

제 포스트 중 본문 부분을 영어로도 번역하고자 합니다.

 

 

목차

1. 춘설헌 설명

2. 의재 허백련과 춘설헌

3. 춘설헌은 의재 허백련만이 아닌, 독립운동가 최원순과 목사 최흥종의 집이었다.

 

1. 춘설헌 설명 (Chun Seol Hun Explanation)

춘설헌은 광주광역시 시도지정문화재로서 지정이 되어 관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광주의 대표적 문화재입니다. 지금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이 되어 있죠.

조적(組積)과 박공지붕의 단순한 외형으로 된 현대식 건물입니다.

다다미방과 온돌방으로 된 두 칸의 방이 각각 있고,

가운데에 부엌이 있으며, 거실이 있는 곳과 복도가 있는 곳으로 나뉩니다.

 

춘설헌은 광주광역시 동구 무등산에 위치해 있습니다.

근처가 바로 무등산 증심사와 의재미술관에 위치해 있죠.

 

의재미술관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한국화가이자,

진도 운림산방 출신이자, 근대의 마지막 문인화가로서

남종화의 대표인 의재 허백련 선생님을 기리는 미술관입니다.

 

춘설헌에 의재미술관이 위치해 있는 이유는

바로 의재 허백련 선생님과 이곳 춘설헌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지난 2023년에 촬영한 춘설헌입니다. 현재 춘설헌은 공사중입니다.)

 

Chun Seol Hun is a representative cultural property of Gwangju in South Korea, which is designated as a cultural property by Gwangju Metropolitan City and is continuously managed. It is currently designated as a monument in Gwangju Metropolitan City in South Korea. It is a modern building with a simple exterior of masonry and a gable roof. There are two rooms, one with tatami mats and the other with a heated floor, and there is a kitchen in the middle, divided into a living room and a corridor.

Chun Seol Hun is located in Mudeungsan, Dong-gu, Gwangju Metropolitan City. Nearby are Mudeungsan Jeungsimsa and Uijae Museum of Korean Art.

The Uijae Museum of Korean Art is a museum honoring Uijae Heo Baek-ryeon, a representative of Namjonghwa, who is a representative Korean painter of South Korea, a native of Jindo Unlimsanbang, and the last literati painter of the modern era.

The reason why the Uijae Museum of Art is located in Chun Seol Hun is because Uijae Heo Baek-ryeon and Chun Seol Hun are related.

 

2. 의재 허백련과 춘설헌 Uijae Heo Baek-ryeon and Chun Seol Hun

춘설헌은 의재 허백련 선생님의 광주에서의 삶이 그대로 들어가 있는 곳입니다.

현재 의재미술관에 위치한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를 오방 최흥종 목사와 같이 건립하여 그곳에서 농사기술, 특히 차를 재배하는 기술을 가르치며 학업에 힘쓰도록 하였고,

한국화, 특히 전통 서화를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그곳에서 제자들과

숙박하면서, 그림 작업도 하시는 곳이었죠.

(허백련 선생님께 미술을 배운 제자들이 모이는 곳이 바로 연진회입니다. 그래서 무등산 증심사 입구 아래에 있는 연진회 미술원이 바로 그 연진회이지요.)

이곳에서 재배한 차를 ‘춘설차(春雪茶)’라 이름 짓고 “차를 마심으로써 정신을 맑게 하자.”는 차 문화 보급에 앞장섰습니다.

그의 차 습관은 격식을 중시하지 않는 ‘생활차’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찾아온 손님과의 대화를 이어주는 것도 차였고,

그림을 그리기 전에 정신을 가다듬어 주는 것도 한 잔의 차였으니

차와 허백련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생활 그 자체였죠.

 

그런 만큼, 의재 허백련, 춘설헌과 춘설차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였습니다.

 

Chun Seol Hun is a place where the life of Uijae Heo Baek-ryeon in Gwangju is fully incorporated. He established Gwangju Agricultural High Technical School, which is currently located in Uijae Museum of Art, with Pastor Ohbang Choi Heung-jong, and taught agricultural technology, especially tea cultivation technology, and encouraged students to study there. He taught Korean painting, especially traditional calligraphy, to his disciples, and it was a place where he stayed with his disciples and worked on paintings. (The place where the disciples who learned art from Heo Baek-ryeon gather is the Yeonjin Association. Therefore, the Yeonjin Association Art Institute located under the entrance of Mudeungsan Jeungsimsa is that Yeonjin Association.) He named the tea cultivated here ‘Chun Seol Cha (春雪茶)’ and led the tea culture promotion by saying, ‘Let’s clear the mind by drinking tea.’ His tea habit is based on the ‘life tea’ spirit that does not emphasize formality. It was also tea that continued the conversation with the guests who came, and it was a cup of tea that calmed the mind before painting, so tea and Heo Baek-ryeon were inseparable life itself.

Therefore, Uijae Heo Baek-ryeon, Chun Seol Hun, and Chun Seol Cha were inseparable relationships

 

3. 춘설헌은 의재 허백련만이 아닌, 독립운동가 최원순과 목사 최흥종의 집이었다. Chun Seol Hun was not only the home of Uijae Heo Baek-ryeon, but also the home of independence activist Choi Won-soon and Pastor Choi Heung-jong

춘설헌은 의재 허백련과 관련된 곳이지만,

그 이전에 의재 허백련 선생님과의 인연이 닿은 분이 살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춘설헌(春雪軒)은 허백련이 1956년 오방정(五放亭)을 물려받아 낡은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신축한 화실 겸 주택이었기 때문에, 그 이전에는 석아정, 오방정으로서 위치한 곳이었죠.

 

석아정, 오방정은 그 당시 머물렀던 사람들의 호를 따서 지은 정자 이름이었는데, 그 호인 석아랑 오방이 바로, 석아 최원순과 오방 최흥종입니다.

 

Chun Seol Hun is related to Uijae Heo Baek-ryeon, but it was also a place where people who had a connection with Uijae Heo Baek-ryeon before him lived.

Chun Seol Hun (春雪軒) was a studio and residence that Heo Baek-ryeon built in 1956 after inheriting and demolishing the old building of Ohbangjeong (五放亭). Therefore, it was previously located as Seokajeong and Ohbangjeong.

These Seokajeong and Ohbangjeong were pavilion names built following the pseudonyms of the people who stayed there at the time. Those pseudonyms, Seoka and Ohbang, are Seoka Choi Won-soon and Ohbang Choi Heung-jong, respectively

석아 최원순 설명

석아 최원순은 일제강점기 2.8독립선언을 주도하고 식민통치를 비판한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습니다. 1919년 일본에서 유학생들과 함께 2.8 독립선언을 주도하였으며, 동아일보기자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비판하는 글을 쓰셨습니다.

 

최원순은 1910, 지금의 광주 서석초등학교인 광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913년에 졸업하였으며, 지금의 경기고등학교인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다닌 뒤 2년간 교사로 재직하였습니다.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이상재, 한용운, 주시경, 최남선 등을 찾아 역사 연구에 정진하였고. 방학 중에는 광주광역시에 내려와 신문잡지종람소(新聞雜誌縱覽所)에서 최춘열, 강석봉, 최한영 등과 함께 계몽 활동을 하였다. 이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과로 유학하였습니다.

 

일본 유학 중 백관수, 최팔용, 김철수, 이광수, 정광호, 변희용 등 유학생들과 함께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을 설립하고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을 발표하기로 계획하였다. 최원순은 전략상 독립선언문 서명에는 참여하지 않고 거사 이후의 뒷일을 수습하는 역할을 맡았다.

 

1919「2.8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등사하고 2.8독립선언의 막전 막후에서 활동하였으며, 이후 3년간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 순회 강연단으로 활동하였다.

 

19233와세대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동아일보기자로 입사하여 무명회(無名會)[언론인 단체]를 부활시켰으며, 1925131일 무명회 임시총회 자리에서 '전조선기자대회' 개최를 제안하는 등 언론 활동을 펼쳤다. 1926822일 서울에서 동아일보기자로 동아일보1면에 횡설수설이라는 제목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비판하는 글을 실어 옥고를 치렀다. 복역 후 동아일보정치부장으로 있다가 편집국장 대리를 맡았다.

 

19272월 서울에서 안재홍 등과 신간회 발족에 참여하고 신간회 경성지회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극동 정국의 장래, 일본 정국의 추세와 같이 국제 정세와 동아시아 정세를 파악하는 글을 발표하는 등 비평가로도 활동하셨습니다.

 

Seoka Choi Won-soon was an independence activist and journalist who led the 2.8 Declaration of Independenc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criticized colonial rule. In 1919, he led the 2.8 Declaration of Independence with students studying in Japan, and as a reporter for Dong-A Ilbo, he wrote articles criticizing Japan’s colonial rule.

Choi Won-soon enrolled in Gwangju Public Normal School, now Gwangju Seoseok Elementary School, in 1910 and graduated in 1913. After attending the teacher’s course at Gyeongseong High Normal School, now Gyeonggi High School, he worked as a teacher for two years.

While studying at Gyeongseong High Normal School, he devoted himself to historical research by visiting Lee Sang-jae, Han Yong-un, Joo Si-gyeong, Choi Nam-seon, etc. During the holidays, he came down to Gwangju Metropolitan City and conducted enlightenment activities with Choi Chun-yeol, Kang Seok-bong, Choi Han-young, etc. at the Newspaper Magazine Jongramso (新聞雜誌縱覽所). He then studied abroad at Waseda University’s Department of Politics in Japan.

During his study in Japan, he planned to announce a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nd a resolution in the name of the Joseon Youth Independence Corps (朝鮮靑年獨立團) with other students such as Baek Gwan-soo, Choi Pal-yong, Kim Cheol-soo, Lee Kwang-soo, Jung Kwang-ho, Byeon Hee-yong, etc. Choi Won-soon did not participate in the signing of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for strategic reasons and took on the role of settling the aftermath of the incident.

In 1919, he secretly registered the ‘2.8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nd was active in the final stages of the 2.8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nd then for three years he was active as a touring lecture group of the Joseon Student Friendship Association (朝鮮留學生學友會).

After graduating from Waseda University in March 1923, he returned to Korea and joined Dong-A Ilbo as a reporter, revived the Moomyeonghoe (無名會) [press group], and proposed to hold the ‘All-Joseon Journalist Conference’ at the temporary general meeting of the Moomyeonghoe on January 31, 1925, etc. He was active in the press. On August 22, 1926, in Seoul, as a reporter for Dong-A Ilbo, he was imprisoned for publishing an article criticizing Japan’s colonial rule under the title ‘Haphazard Talk’ on the first page of Dong-A Ilbo. After serving his sentence, he served as the political director of Dong-A Ilbo and then as the acting editor-in-chief.

In February 1927, in Seoul, he participated in the founding of the New Book Club with Ahn Jae-hong and others, and served as the secretary of the Gyeongseong Branch of the New Book Club, and published articles such as ‘The Future of the Far East Situation’ and ‘The Trend of Japan’s Political Situation’ to understand the international situation and the East Asian situation. He was also active as a critic

오방 최흥종 설명

오방 최흥종은 독립운동과 농총계몽운동, 빈민운동 등에 힘쓴 목사셨습니다. 특히 나병 환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1909년 제중원에서 나병 환자를 치료하는 조수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1911년에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광주 봉선동의 땅 1000평을 무상으로 기증해 한국 최초의 나환자 수용시설인 광주나병원을 설립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광주에 있다가 그 이후에 일제의 명령으로 여수로 이전을 한 여수 애양원입니다.

(그 이후에 1962, 광주광역시 동구 소태동에 한국한센복지협회 부설의원 광주 전남지부의 한센병 전문병원 광주나병원을 건립하여 지금까지도 나병을 비롯한 피부과 진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19193·1운동에 참여하여 14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난 뒤 평양신학교에 들어가 목사 자격을 얻었고, 1920년 광주 YMCA를 창설하였습니다. 1932년에는 나환자근절협회를 창설하고, 1933500여 명의 나병 환자들을 이끌고 광주에서 경성의 조선총독부까지 '구라(救癩) 행진'을 벌여 일본 총독으로부터 소록도 재활시설 확장에 대한 확답을 받아냅니다. 광주 YMCA는 지금도 광주광역시 시내인 충장로에 지부를 두고 있고, 소록도의 재활시설은 오늘날에도 고흥군 소록도에 남아 있습니다.

 

그 후, 1935년 교계의 신사참배 결의에 절망해 스스로 사망통지서를 돌리고 세상을 등진 뒤에 무등산에 은거하면서 성경과 노자의 도덕경을 공부하며 지내시다가, 1945년 전남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직을 14일 만에 사퇴하고 1947년 한국나병예방협회를 창립하여 나병을 고치는데 힘쓰시며 일생을 보내셨습니다.

 

Pastor Ohbang Choi Heung-jong devoted his efforts to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 enlightenment movement of the agricultural community, and the poor people’s movement. In particular, he started working as an assistant to treat leprosy patients at Jejungwon in 1909, showing interest in leprosy patients. In 1911, he donated 1,000 pyeong of land he owned in Bongseon-dong, Gwangju, for free to establish Gwangju Leprosy Hospital, the first leprosy patient accommodation facility in Korea, which is now the Yeosu Aeyangwon, which was located in Gwangju and then moved to Yeosu by the order of the Japanese.

(Later, in 1962, the Gwangju Jeonnam Branch of the Korean Hansen’s Welfare Association established a specialized hospital for Hansen’s disease, Gwangju Leprosy Hospital, in Sotae-dong, Dong-gu, Gwangju Metropolitan City, and is still conducting dermatology treatment including leprosy.)

After serving a prison term for one year and four months for participating in the March 1st Movement in 1919, he entered Pyongyang Theological Seminary and obtained a pastor’s qualification, and established Gwangju YMCA in 1920. In 1932, he established the Leprosy Eradication Association, and in 1933, he led about 500 leprosy patients from Gwangju to the Governor-General of Korea in Gyeongseong and carried out a ‘Gura (救癩) March’, receiving a confirmation from the Japanese governor about the expansion of the rehabilitation facility in Sorokdo. The Gwangju YMCA still has a branch in Chungjang-ro in downtown Gwangju Metropolitan City, and the rehabilitation facility in Sorokdo is still in Sorokdo, Goheung-gun today.

Afterwards, in 1935, he despaired of the decision of the church to worship Shinto, turned his own death notice, and retreated from the world. He lived in Mudeungsan, studying the Bible and Laozi’s ‘Tao Te Ching’. In 1945, he resigned as the chairman of the Jeonnam National Foundation Preparatory Committee after 14 days, and in 1947, he established the Korean Leprosy Prevention Association and devoted his life to curing leprosy.

 

 

4. 에필로그 - 셋을 연결하는 춘설헌

 

석아 최원순, 오방 최흥종, 의재 허백련 이 세 인물을 연결해주는 것이 바로 무등산과 춘설헌이었습니다.

 

춘설헌은 석아 최원순, 오방 최흥종, 의재 허백련이라는 동시대의 다른 직업을 가진 광주광역시에서 활동한 세 명의 인물을 연결하는 장소였던 셈이죠. 춘설헌은 특히, 무등산에 머무르면서 교육 및 사회 운동, 계몽 운동을 한 장소이면서도, 소정 변관식, 지운 김철수, 다석 유영모, 노산 이은상, 함석헌 등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찾을 정도로 호남 제일의 인문학 살롱이었습니다.

 

한적했던 무등산에 여러 명사들이 찾았던 춘설헌, 지금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무등산에서 많은 관광객과 등산객, 그리고 체험학습을 오는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찾는 곳이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소중한 광주광역시의 문화재인 춘설헌이 보존되었으면 좋겠습니다.

 

Seoka Choi Won-soon, Ohbang Choi Heung-jong, and Uijae Heo Baek-ryeon, these three figures are connected by Mudeungsan and Chun Seol Hun.

Chun Seol Hun was a place that connected three figures, Seoka Choi Won-soon, Ohbang Choi Heung-jong, and Uijae Heo Baek-ryeon, who had different professions and were active in Gwangju Metropolitan City at the same time. In particular, Chun Seol Hun was a place where education, social movements, and enlightenment movements were conducted while staying in Mudeungsan, and it was the best humanities salon in Honam, where famous people from all over the country, such as Sojeong Byeon Gwan-sik, Jiwoon Kim Cheol-soo, Daseok Yu Young-mo, Nosan Lee Eun-sang, Ham Seok-heon, etc., would visit.

Chun Seol Hun, where many famous people visited in the quiet Mudeungsan, is now a place visited by many tourists, hikers, and many children and teenagers coming for experiential learning in Mudeungsan, which is designated as a national park.

I hope that Chun Seol Hun, a precious cultural property of Gwangju Metropolitan City, will be preserved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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